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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 연애천재 여친님과 성실정력열애 중 / 렛세이 4기 화요일의 낑깡 / #Pride #LoveWins #LoveIsLove #Feminist 김철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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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3.22 [레즈비언 에세이/렛세이] 비밀 : 가장 듣고 싶은 말

[레즈비언 에세이/렛세이] 비밀 : 가장 듣고 싶은 말 







- 전에 말했던 내 첫사랑 말이야. 걔 사실, 여자야.


평소처럼 맛있는 안주를 앞에 놓고, 한 병 두 병 빈병의 개수가 늘어가고 있던 때였다. 그녀의 갑작스런 고백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그게 뭐, 하고 웃어버렸다. 사실 그때의 나는 오래도록 나 자신의 성지향성에 대한 생각이나 섹슈얼한 욕망들이 멈춰 있는 상태였다. 잠시 동안 레즈비언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나는 끝내 “사실 나도 레즈비언이야”라는 말은 하지 못 했다. 그날 그녀의 커밍아웃 이후, 나는 가장 깊은 곳까지 보여줬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처음으로 비밀을 갖게 되었다.


시기를 놓친 커밍아웃만큼 어려운 것도 없을 거다. 처음에는 그저 때를 놓쳤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내게 사귀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얘기하게 되겠지 싶었다. 아예 말하지 않게 되더라도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는 시간들이 해를 거듭하며 쌓여 가는 동안 그녀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내게는 없는 단호함, 자기 앞의 현실을 똑바로 보는 영민한 눈동자, 늘 곧게 펴고 있는 작은 등의 완숙함. 그러면서도 즐거움을 쫓는 것과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는 그 안의 작은 소녀. 그녀는 언제고 지금을, 삶을, 인생을 진짜 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곁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나를 내려놓은 시간 속에 갇혀있던 나를 진짜 ‘나’로 살도록 자꾸만 채근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느 저녁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이것저것 먹을 것을 잔뜩 사들고 들어가 부엌에서 요란을 떨며 웃고, 떠들다가 그녀의 집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TV에는 우리가 막 좋아하기 시작한 신인 아이돌의 얼굴들이 나오고, 종류별로 잔뜩 사온 술병은 금방금방 비워졌다. 한껏 취기가 올라 있던 우리는 담배를 태우러 베란다로 나갔다. 쌀쌀해진 날씨에 담요를 돌돌 말고 담배를 태우는 옆얼굴을 빤히 보다가, 문득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깨닫는 순간, 세상에서 제일 몹쓸 놈이 된 기분이었다. 친구를 상대로 그런 마음을 가졌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무살 이후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만취한 그녀는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고, 남겨진 나는 홀로 남은 술을 비웠다.


타이밍을 놓친 커밍아웃 문제를 안일하게만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스스로를 자각한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가장 먼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좋은 친구였다. 둘이서 술자리면 술자리, 영화면 영화, 각종 공연관람 및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관계. 처음에는 거기에 연애를 더할 생각은 차마 들지 않았다. 이미 서로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안정적인 관계에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이인 양 만나는 우리를 생각하는 건, 아주 무서운 일처럼 느껴졌다.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란 감정은 소모적이기에 언젠가는 바닥이 드러날 것이고, 연애에는 결국 끝이 있다고 믿었던 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녀 역시 내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명은 침대에서, 한 명은 바닥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에 굳이 아래로 기어 내려와 나를 끌어안는 팔. 뜻하지 않은 오해로 답지 않게 눈물을 보이며 속상해하는 모습. 세상에서 귀찮은 걸 제일로 싫어하면서 때 아닌 폭설을 뚫고 집 앞까지 만나러 와준 날. 나랑 결혼할래? 장난스럽게 물으며 자꾸만 함께 하는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일.


그렇게 20대 초반부터 계속 친구로 지내왔던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눈치 없는 내가 제대로 용기를 낼 때까지 계속 밀어붙여주던 그녀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이다. 사귀지 않는다면 다시는 친구로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던 단호한 입술의 모양은 지금 생각해도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모 레즈비언 팟캐스트에게도 새삼스럽게 감사한 마음이다. 조금은 돌아온 것 같기도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제대로 손을 잡고, 같은 미래를 그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랑 대신, 평생을 함께 할 우정을 간직하는 것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했던 내게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결정하기에 아주 적절한 때라고. 지금까지 우리는 사이가 좋았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변함없이 좋을 거라고. 언제고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누군가 마음을 숨겨야 하는 비밀 때문에 마음을 앓고 있다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돌이켜보면 바야흐로 삽질의 현장이었던 나의 지난 일이 그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출처] [낑깡] 비밀 : 가장 듣고 싶은 말|작성자 #렛세이

http://letssay_q.blog.me/220661850020







자세한 이야기는 나란한 걸음 카테고리의 +1일의 글을 읽어보시면 좀 시원해지시겠죠.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수많은 레즈언니들에게 재미있게 읽히기를 바라며 써봤던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렛세이어 분들이 여친님 넘 멋있는 사람이라고 꾸준히 얘기해 주시는 부분..^^ 

Posted by 김철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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